무비스님 천수경 강의

무비스님의 천수경 강의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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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Date
2020-03-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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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
진에중죄금일참회 瞋恚重罪今日懺悔
치암중죄금일참회 癡暗重罪今日懺悔

백겁적집죄 百劫積集罪
일념돈탕제 一念頓蕩除
여화분고초 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 滅盡無有餘

죄무자성종심기 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 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 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 是則名爲眞懺悔

안녕하십니까. 어제까지 악구중죄, 탐애중죄, 이런 것들을 참회하는 그러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해가면서 온갖 일들을 많이 저지르게 되죠. 꼭 죄를 짓고 업을 짓는다고 하기보다는 좋은 일도 많이 하게 됩니다. 물론 좋은 일도 업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는 그런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아니한 부정적인 면, 어두운 면, 삶에 있어서 먹구름과 같은 그런 면들을 주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또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참회를 해야된다고 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뒤에 나오겠습니다마는 사실 우리가 이런 온갖 죄를 짓는 양상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람의 진실 생명,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바탕에는 본래로 이런 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惡이 없는데 우리가 망령된 마음을 일으켜서 업을 짓게 되고 그 업에 따라서 온갖 죄를 또 따라서 짓게 되고 그러다 보면은 그 죄의 과보를 우리가 받게 되는 거죠. 그러한 절차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있고 일어나고 있고 당면하고 있는 그런 부정적인 면들, 죄의 면, 업의 면, 이런 것들을 인간의 본모습이다 라고 이렇게 우리가 이해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 그야말로 우리들의 진실 생명은 본래로 악이 없는 상태입니다. 전혀 악이 없고 그야말로 부처고 진여 그 자체고 진실 생명이고 아주 청정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망령된 마음을 일으켜서 그 망령된 마음은 탐진치 삼독을 통해서 일어나는 거죠. 탐진치 삼독을 마음대로, 방자하게 놓아두다 보니까 그것이 온갖 업을 짓게 된다 하는 그런 견해들을 우리가 확실히 하고 참회를 할 줄 알아야 올바른 참회가 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진에중죄금일참회(瞋恚重罪今日懺悔)죠. 진에, 진에는 성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성낼 瞋(嗔?), 성낼 恚 字죠. 성낸 무거운 죄를 금일에 참회합니다. 성낸다고 하는 것은 화도 되겠고 분노, 진심(嗔心)이라고도 표현을 하고 그러죠.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 참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실은 자그마한 것이 크게 불어나서 본래의 원인은 아주 작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노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아주 큰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또 종래에 가서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입장까지 몰고 가는 일들이, 열 가지 惡 중에서 사실은 이 진에, 분노, 화, 이것 같이 심한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물론 뭐, 기어,양설, 악구, 망어, 탐애, 이런 것들도 물론 발전을 해서 크게 됩니다마는 제일 인간에게 있어서 쉽게 발전하고 크게 발전하는 우리의 악업 중에는 진노, 분노, 진에, 이 화내는 일 같이 쉽게 발전하고 또 크게 발전하고 또 그것이 발전해서 아주 큰,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중죄를 범하게 되는 그런 일은 아마 분노에 지나가는 게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 분노의 문제에 대해서 화내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많이 경계를 하고 계십니다. 부처님도 아주 심한 표현으로 사람이 분노하는 것은 입에 피를 문 것과 같다, 그 분노를 사람에게 터뜨리는 일은 입에 피를 물고 남을 향해서 (입에) 문 피를 얼굴에 뿌리는 일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피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어떻습니까. 정말 얼굴에 뿌려졌을 때 참으로 흉하기 이를 데 없죠. 그런 흉한 것을 입에 물었다고 하는 것은 분노를 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이 분노를 품어서 남에게 뿌릴 때, 피를 뿌릴 때 그 피가 혹 상대에게 갈 수도 있고 뿌려도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상대에게 가고 안 가고 관계없이 이미 자기 입에는 피를 한 입 물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참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내가 분노를 해서 상대에게 분노를 터뜨렸든 안 터뜨렸든, 터뜨려서 영향을 얼마나 미쳤든 못 미쳤든 관계없이 이미 우리가 분노를 하고 있다면은 그 분노의 패악은 그렇게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심한 비유죠.

그리고 부처님 당시 때에도 다른 종교를 믿는 바라문들이 자기의 제자들이 부처님에게로 많이 교화가 돼서 부처님 제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자기 제자가 부처님께로 가버렸으니까 아주 화가 나고 참을 수 없어서 부처님께 와서 그야말로 갖은 욕설을 다 퍼붓고 자기의 분노를 마음껏 터뜨리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그 분노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조용히 가만히 상대하지 않고 있으니까 또 이 바라문은 가만히 계신다고 해서 더욱 더 부처님께 왜 가만히 계시느냐고, 나는 이렇게 화를 내고 분노해 하는데 왜 부처님은 가만히 계시느냐고 하면서 또 분노를 터뜨리는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랬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는 분노를 터뜨렸는데 나는 조용히 이렇게 아무 관계없이 앉아 있다. 이러한 경우를 내가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해 보겠다.

집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서 아주 맛난 음식을 한 상 차려서 대접을 했는데 손님은 배가 부른 관계로 전혀 그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을 그냥 물렸을 경우 그 상에 차려진 음식은 누구의 것이겠는가." 그러니까 이 바라문이 대답하기를, 그거야 두말할 것 없이 그 음식을 차린 주인의 것이 되지 누구의 것이겠느냐고, 손님이 먹지 아니하면 그건 당연히 주인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렇게 대꾸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옳은 말이다, 그와 같이 분노에 있어서도 아무리 분노를 크게 터뜨려도 상대가 받아주지 아니할 때 그 분노는 분노를 터뜨린 사람의 것이지 결국 상대의 것은 되지 못한다, 결국 분노를 터뜨린 사람만이 어리석을 뿐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분노라고 하는 것, 우리가 상대의 분노를 따라서 함께 분노해도 물론 안 될 일입니다마는 먼저 분노하는 것, 당연히 삼가해야 할 일입니다. 이 분노, 이것은 사실은 조그마한, 돈 일이만원의 문제 때문에 조그마한 분노를 일으켜서 말이 오고 가고 흉한 말이 더 흉한 말로 오고 가고 하게 될 때 그 다음은 이 분노 때문에 돈 일이만원이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고 서로 터뜨린 그 분노 때문에 아주 큰 일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어떤 사건까지 몰고 가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 진에, 분노,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우리의 진실상은 본래로, 우리 본바탕에는 그러한 분노같은 좋지 아니한 일은 없다라고 하는 그러한 사실도 생각해 주십시오. 분노가 본래 없는 것, 기쁨과 청정만이 우리의 본 얼굴이고 본래의 모습이다 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야 참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치암중죄금일참회(癡暗重罪今日懺悔)죠. 치암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대로 어리석음. 탐 진 치, 마지막 치암(癡暗)인데 이것은 마음이 일으키는 세 가지다, 이렇게 하죠. 맨 처음에 몸이 짓는 세 가지, 입이 짓는 네 가지, 그 다음에 마음이 짓는 세 가지,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열 가지 악을. 치암, 어리석고 우둔함, 어리석음의 어두움입니다. 마음의 어두움. 지혜가 없다, 마음에 지혜의 빛이 없는 그러한 상황을 치암이다, 그렇게 합니다. 어리석음을 통해서 참으로 아주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그런 경우죠. 그래서 어리석음을 통해서 무거운 죄를 범한, 그런 모든 죄들을 금일에 모두 참회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일으키는 번뇌, 또 온갖 망상, 이것을 우리가 팔만 사천 번뇌다, 또 팔만 사천 망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그것을 우리가 간추리면은 백팔 번뇌니,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러나 백팔 번뇌든 팔만 사천 번뇌든간에 그 근원은 요약하면은 사실은 탐심, 진심, 치심이다, 탐욕과 분노와 그리고 어리석음의 이 세 가지에서 사실은 벗어나지 않는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죠.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통해서 발동함으로, 일으킴으로서 온갖 백팔 번뇌, 팔만 사천 번뇌까지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흔히 팔만 사천 법문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일으키는 팔만 사천 가지의 부정적인, 좋지 못한 일들을 일으킴으로 그 팔만 사천 가지의 좋지 못한 일들을 잠재우고 대치하고 그것을 씻어내고 또 그것을 말끔히 가라 앉히는, 그래서 완전히 참회되어지는 그러한 가르침이 팔만 사천 법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팔만 사천 번뇌를 대치하기 위한 팔만 사천 종류의 가르침.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사실 불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짓는 온갖 부정적인 것, 지어서는 안 될, 그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가 여기서 보고 있는 열 가지 악한 것, 이것을 제거하고 잘 다스리고 잠재우기 위한 그러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또 어떤 방법으로 참회를 할 것인가.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 하나 드러내는 그런 입장의 참회가 아니고 이 참회의 법은 사실은 지극히 대승적인 그런 참회법이고 또 어떻게 보면은 선리적(禪理的)인 참회법이 다분히 담겨 있습니다. 다음 구절로 연결되는 '죄무자성종심기...'까지 합해서 이 두 게송은, 이 두 싯구는 이 <천수경>에서 아주 그 선지(禪智)로 빛나는 그러한 아주 차원높은 가르침이다, 이렇게 보아집니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백겁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세월입니다. 한 일 겁이 참으로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나긴 세월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아시죠. 그런 기나긴 세월이 백번이나 반복되도록 무한한 과거에 우리가 살아오면서 또 사는 과정에서 지어 온, 쌓아 온 그런 온갖 모이고 모인 죄들을,

한순간에 다 탕제해버린다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 녹여서 제거해버린다. 몰록, 한꺼번에, 이런 말이죠. 여기서 일념(一念)이라고 하는 것은 한 생각이 아니고 한 순간입니다, 한 순간. 불교에서 일념이란 한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 이 한 순간은 일초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이죠. 일 찰나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일념이란 일 찰나에 구백 생멸(生滅)하는 그 구백분의 일 찰나를 일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확한 설명이 되겠습니다. 그와 같이 짧은 순간에, 구백분의 일 찰나에 해당되는 그런 짧은 순간, 그것이 일념인데 그 일념 순간에 다 녹아서 제거해진다, 없어져버린다, 없앤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백겁(百劫)과 일념(一念)이라고 하는 것이 댓구로서 아주 좋은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한히 긴 과거 생을 통해서 쌓아온 그런 죄들을 한 순간에, 지극히 짧은 한 순간에 다 녹여진다, 다 녹여지이다.

마치,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마치 불이 마른 풀을 태워버리는 거와 같이. 바싹 마른 풀이 한 줌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불에 던져 넣었을 때 얼마나 잘 타겠습니까. 그와 같이, 그 말입니다. 불이 마른 풀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이,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멸진해서 소멸해서 다 소멸해서 조금도 남음이 없어지이다. 조금도, 티끌만치도 남지 않게 하여지이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참, 우리가 살아오면서 나는 왜 이렇게 업이 많은가. 또 전생에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모든 일이 풀리지 않고 우리 삶은 이렇게도 애로가 많고 여러 가지 힘겨운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우리가 세상을 사는 사람 치고 한두 번 안 해본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불교적으로 다 업에 의한 것이다, 또 우리가 전생에 지은 죄업에 의한 것이다, 하는 그런 생각은 우리 불교인들이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 생각 제대로 우리가 마음가짐을 가질 때 사실은 그것은 순간에 없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순간에 없어져야 되는 것이고 또 순간에 없어지는 원리가 이 가운데 또한 있습니다. 다음 구절이 그러한 것들을 잘 나타내고 있죠.

이렇게 한 순간에 없어지는 도리가 만약에 없다면은 불교의 마음의 이치는 사실은 별로 효력이 없는 거죠. 마음의 이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열 가지 악을 지으면서, 팔만 사천 번뇌를 통해서 온갖 지은 업장들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지는 이치, 이것이 불교 교리의 장점이고 또 이것은 단순한 불교 교리라고 하기 보다는 마음의 원리고 마음의 원리는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하나의 이치가 이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꼭 알아야 되고 이러한 마음의 원리, 이것을 우리가 배제해 버린다면은 사실은 불교의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 긴 긴 세월에 지은 많은 죄업들이 어째서 한 순간에 사라질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의문스럽고 쉽게 믿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불교의 이 마음의 원리는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일 설명될 구절이 바로 그러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이치가 가능한가. 과연 그런 도리가 있는가. 이것은 다음 구절에 설명 되어지고 있죠.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이것이 진실한 참회다, 참다운 참회는 이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설명드리기 전에 그럼 진실하지 못한 참회는 어떤 것인가. 불교의 참회법에는 이참과 사참이 있습니다. 이참(理懺)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치대로 참회하는 것, 진리에 맞는 참회. 마음의 도리에 맞는 참회. 이것을 이참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드릴 수가 있고, 마음에 맞는 도리, 마음의 도리에 맞는 참회, 진리에 맞는 참회, 그러한 참회가 있는 반면 사참(事懺)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식적인 참회, 또 어떤 육체적인 참회, 또 입으로, 말로, 이런 모든 신구의 삼업을 동원해서 절도 하고, 무릎이 닳도록 절도 하고 염불도 하고 그야말로 그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서 내가 봉사도 하고 큰 보시도 베풀고 이러한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참회를 하는 그런 참회를 사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참’ 할 때는 이치 理 자, 참회라고 하는 懺 자를 쓰고, ‘사참’ 할 때는 일 事 자, 참회라고 하는 懺자를 씁니다.

이 이참과 사참을 우리가 꼭 염두에 둬야지 앞으로 설명되어지는 이참의 참회만을 가지고 우리가 참회의 모든 것이 다 그 속에 있다라고 해도 문제가 있고 또 절하고 기도하고 그 다음 무슨 어떤 보시를 하고 하는 그런 일만으로 참회가 또 다 끝났다, 이렇게 생각을 해도 그것은 잘못된 참회입니다. 완전한 참회는 못 되는 것죠. 그래서 사실은 이참과 사참이 병행이 되어야 됩니다. 마음으로는 그야말로 본래 죄가 없다, 앞으로 설명되어질 구절처럼 그렇게 알되, 그렇게 알면서 본래 죄가 없는 그 죄를 또한 우리는 부단히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할 줄 아는 그러한 마음 자세. 이것이 바람직한 참회다, 이렇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게 되겠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 단, 마음에서부터 일어났다, 이런 말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 사실 우리가 죄, 죄, 합니다마는 죄업이니 죄니 하는 말을 흔히 씁니다마는 그것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어떤 고정된 형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죄는 자성이 없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죄라고 하는 뚜렷한 그 무엇은 없는 것입니다. 고정불변하는, 죄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 죄, 수없이 이야기하나 정말 생각해보면은 죄에 대한 실체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무자성이라, 죄는 자성이 없다, 이렇게 보는 거죠. 단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것, 또 죄를 짓는다고 하는 일, 그 자체는 결국 무엇이 하는가.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그런 죄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죄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죄책감이 허망하다고 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있되 있는 것은 어떤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우리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마음은 망심(妄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심(眞心)이 아니죠. 청정한 마음, 우리 본래의 마음이 아니라 망령된 마음이다 그러죠. 망심이라 그럽니다. 망상심, 그렇게 표현하면 되겠죠. 망상심, 망령된 마음, 좋지 아니한 생각, 좋지 않은 생각, 이것을 망심이라 이렇게 합니다. 그런 좋지 아니한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이라. 그런데 그런 좋지 아니한 생각, 망상심, 그 망심은 사실은 따져보면은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일으켜서, 다시 말해서 이 말을 들을 때 분명히 말을 분별하고 듣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은 또 그 음악 따라서 마음이 분별하고 분명히 잘 듣습니다. 분명히 마음이 들어서 그렇지만은 하루종일 우리가 마음을 일으키는 그 마음의 양이 사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우리가 활동하는 작용하는 그 마음의 작용이 참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길을 가면서 차를 타고 가면서 온갖 것을 다 놓치지 아니하고 다 분별하고 식별하는 그런 마음의 작용들. 또 뿐만 아니라 누구와 만나고 대화를 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 대화의 내용을 이해를 하고 또 거기에 따른 대답을 만들어내고 하는 그런 작용들. 참으로 하루에 일으키는 마음의 작용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마음의 작용이 있지마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그 마음이 흘러나오는가, 어디로부터 그 마음의 작용이 발생하고 있는가를 찾아보면은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근원이 없기 때문에, 적멸하기 때문에, 텅 비어있는 것이 마음의 실체이기 때문에. 역시 망상심이 그렇습니다. 망상심도 마찬가지예요. 망상심, 망령된 마음도 역시 근원은 텅 비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종일 마음을 일으켰지만 그 마음 나온 장소를, 근원을 찾아볼라치면 도저히 찾을 길이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순간, 그 순간 딱 멈추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이 부족하고 앎이 없어서 깨달음이 없어서 마음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석가, 달마도 그 자리에는 찾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삼척동자도 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을 부정은 도저히 못하죠. 그러나 그 부정하지 못하는 마음, 사실 찾아볼려고 하면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 그것은 누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 이것이 또한 마음의 묘한 이치인 것이죠.

그러므로 마음은 근원이 텅 비어 있는 까닭에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이라 그랬습니다. 마음이 만약 소멸할 때에 마음에 얹혀 있는, 마음으로 통해서 지어졌던 그 죄 또한 소멸하는 것이다. 이게 이참(理懺), 그야말로 진리로서의 참회, 마음의 理法에 따라서 참회하는, 마음의 이치에 따라서 참회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마음도 없고 마음에 실려 있는 죄도, 죄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일으킨다고 했으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고 그랬죠. 본래 아무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인데 오직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하루 종일 너무나도 많은 작용을 일으키고 있지마는 정작 그 실체를 찾아볼라치면은 그 실체는 텅 빈 것이고 공적한 것이고 없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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