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파법사

처사와 거사 사이

Author
admin
Date
2020-03-1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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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와 처사사이

 

절에 나오는 남자 신도들을 두고 붙혀진 두 이름이 있다. 거사와 처사다.
어떤 절에 가보면 “거사”라는 호칭이 많고, 또 어떤 절에 가면 “처사”라는 호칭이 많다. 또 어떤 절에는 ‘거사’와 ‘처사’를 혼용해 사용하기도 한다.

말을 전개하기 전에 우선 어원부터 찾아보자
거사란 말은 부처님 당시 재가남자신도로 덕이 높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 유마힐 거사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고, 처사란 말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 낙향하여 무의도식하는 사람을 두고 일컬었던 말이다.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말은 처사란 말이다.

이 처사란 말이 어떻게 절집에 들어 왔을까?  조선시대의 말이니까 조선시대로 거슬러 유추해 보자.
억불숭유, 삼국시대엔 국교가 되다 싶이 했던 불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억불숭유 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 가기 시작한다. 태종 때는 11개종단을 7개 종단으로 줄였고, 세종대에 와서는 7개 종단마져 선종과 교종 2개 종단으로 줄였으며, 사찰 수도 각각 18개로 국한시켜 통합 36개 사찰만 인정하게 되었으며, 더불어 스님들의 도성출입 또한 제한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불교는 산중으로 산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산중으로 들어간 사찰의 유지는, 몇몇 스님들과 부녀자들에 의해서 겨우 그 명맥만 유지 되어 갔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그 시대 남자들이 절에 간다는 것은, 뜻이 있어 출가를 결심한 사람을 제외 하고는, 그야 말로 할 일 없고 호구지책으로 절을 찾아간다거나, 아니면 떠돌이 신세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고자 절을 찾아든 자들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시대를 조금 내려가 보자.
해방이 되고 또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우리들이 법명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대덕스님들이 출연하게 된다. 물론 그런 대덕스님들을 보필하며 절을 유지해 나가는데는 역시 부녀자들의 신심과 원력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럼 여기서 있을 수 있는 한 사례를 상상해 보자.
어느날 부인이 남편을 데리고 절에 가 큰 스님께 소개했다고 할 때, 그때 큰 스님은 그 부녀자의 남편을 뭐라고 불렀을까?
그 남편이 무엇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또 그 남편이 불교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또 무엇하려 오늘 절에 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스님은 장로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를 수도 없고, 거사라는 명칭을 사용해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나타난 적당한 말이 유교에서 나온“처사” 라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큰스님으로부터  “처사”라는 호칭을 들은 부인은, 큰 스님이 던지신 그 한마디 때문에 이후 줄곧 남편의 이름 뒤에 ‘처사’라는 명칭이 붙어 다녔을 것이다. 이렇게 큰 스님 회상에 모여든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처사’라는 명칭은 더 많이 알려지고  또 굳어져 갔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져, 오늘날에도 남자 신도들에게 붙여진 ‘처사’ 라는 호칭은 각 사찰에서 통용되고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 많은 세월 속에 불교의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사찰은 문을 열어 템플스테이 등으로 불교를 대중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게 되고, 사회일각에서는 불교교양대학이 도처에 생겨,  너도나도 참불가가 되기 위한 학업의 열기가 대단하다. 기초교리를 배우는 사람, 불교미술을 공부하는 사람, 경을 보는 사람, 수행을 일상화 하는 사람, 염불을 익히는 사람들이 늘어 나고, 더불어 5계 내지 보살계를 받아, 진정한 불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절마다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천배, 만배, 백만배로 자기의 몸을 스스로 맑히는 불제자가 또한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잘 다듬어진 법복을 입고, 원근 사찰을 찾고 있다. 이들 중에는 부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성불자들도 그에 버금갈 만큼 많이 늘었다. 금년으로 23회째를 맞이했던 조계종의 포교사 인구도 이제 4,500명이 넘는다. 그들이 어느곳에서 어떤 일을하고 있는지는몰라도 그만큼 불교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된다.

그런데 이즈음 절에 나오는 남성불자들에게 무슨 명칭을 붙여야 할까?
아직도 입에 익은 그대로 ‘처사’라고 부르는 스님들이 있고, 더러 젊은 아녀자가  나이드신 남자 신도에게 공공연히 ‘처사님’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남자신도가 남자 신도에게 ‘처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여성신도들의 명칭은 언제부터인지  보살이란 명칭으로 고착 되었다. 아마 이에는 어려운 시기에 불교를 지켜준 보답도 조금은 작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 집안에서 보살은 무엇인가.
보살이란 범어 보리살타(Bodhisattva)의 준말로, 보리(Bodhi)는 진리, 깨달음이고, 살타(sattva)는 중생, 유정이니 “깨달음 속에 있는 중생”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보살은 깨달음의 마음을 내며,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최상의 과제로 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불가에서는 보살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살이란 부처보다 한 단계 낮은 경지에 있으면서, 수행이 깊고 원력이 높은 이들을 가르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불제자들은 모두가 보살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그렇게 보살이 되기 위해 보살운동을 전개함이 마땅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보살이란 명칭은 절에서 여자신도를 부를 때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 거사라는 명칭은 무엇일까
거사란 말은 부처님 당시 재가남자신도로 덕이 높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 유마힐 거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언하건대 거사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삼귀․ 오계를 지키며 불교신행 을 하는 재가 남자신도를 ‘거사’라 부른다.  유마거사의 유마경에는 ‘부처는 한 가지 소리로 설법하지만, 중생은 이를 여러 가지로 듣는다.’고 하는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유마거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이 얼마나 견고하고, 수행과 덕이 높은 분이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거사와 처사사이!
이 사이는 자로 잴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처사’란 인격은 유교사상을 이념으로 한 조선시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골에 낙향하여 은둔과 도피, 그리고 세상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낸 무능한 남자들을 가르켜 그냥 처사라고 불렀다.

어떤 큰스님께 여쭈었다.
재가 남자신도를 ‘처사’라고 부르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큰 스님은 대답하신다.
그런 천박한 단어를 어찌 절집에서 사용하느냐고? 그런 말은 절집에서 하루 속이 없애야 할 말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또 어떤 남자신도는 말한다.
어떤 절에가면 유달리 보살들이 자기더러 ‘처사님’ ‘처사님’ 그러는데, 그 소리를 듣는 기분이 좀 묘했다고 한다. 왜 그랬냐고 다시 물으니, 자신이 매기는 수행점수가 처사 밖에 안될지 몰라도, 설사 그렇더라도 그 보살들이 자기를 모를텐데 무조건 처사 처사하고 부르는 것은 마치 자신의 불교적 인격이 강등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 절에 가는 발걸음이 쉽지 않았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다시 상기해 보자. 요즘에는 예전 ‘처사’가 주는 의미를 안고 절문을 들어서는 남자신도는  아무도 없다. 또 갈 곳이 없어 절문을 찾는 이들도 없다. 그리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절문을 들어서는 남자신도들은 더더욱 없다. 나름대로 불교적 인격을 갖추고, 자기 수행의 점검과 불교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한 진심으로 그들은 절을 찾고 있다.

절집에는 사부대중이 있다. 비구,비구니, 우바새,우바이가 바로 그것이다.
비구스님과 비구니 스님은 자연스레 귀에 익은 말이지만, 재가 남자신도를 우바이라 하고, 여자신도를 우바새라 하는 경우는 어느 종단에도 없는 사례 같다.

그런데 이 사부대중은 수행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들이다. 그리고 수행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최상의 답은 화합이다. 이 최상의 화합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구구히 부처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순화된 언어인 정어를 써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고 상대를 덕으로 감싸 주는 말을 써야 한다.

듣기 좋은 말은 귀가 즐겁고 행복하며, 맑은 살림을 사는 기련을 제공한다. 반면 듣기 싫은 말은 번뇌를 키우고 원망을 키우고 말세의 행동을 잉태하게 하여 원증회고의 늪에 빠지게 한다. 이런 뜻에서 생각하면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절에서 남자 신도를 가르켜 ‘처사’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마땅치 않는 말이라 생각한다.

인격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 하듯이 남자 신도들은 ‘거사’로 통칭함이 바람직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40대 이후면 당연히 '거사님'으로 호칭하고, 2~3십대 젊은 층 남자신도들에게는 '법우'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내가 상대를 높일 때 나도 더불어 높아질 수 있으며, 상대를 존경할 수 있어야 나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남의 종교에서 쓰는 말이 된 장로라는 말은 원래 불교의 언어였다.
장로(Ayusmart)는 범어 ‘아유솔만’이라 하여 음역하면 존자, 구수라고 번역한다. 장로란 덕이 높고 수행을 많이하여 지혜와 도덕이 뛰어나고  나이가 많은 분을 일컫는다.

금강경에서 '장로수보리'라는 말이 나오지만 오늘날 우리의 불교는 이 좋은 말을 지키지 못했다.
지켰더라면 불교계에도 '장로거사' '장로보살'이란 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의 인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기가 ‘거사’라고 불려지는데 대해 쑥스러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처사’라고 불려지는 편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신도들도 자신이 ‘보살’이라고 불려지는데 대해 민망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노력해야 한다. ‘거사’라는 명칭에도 자기 마음이 쑥스럽지 않고, 보살이라는 명칭에도 자기 마음이 민망스럽지 않도록 함께 공부하고 수행정진하는 참 불자로 거듭나는 그런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노력이야말로 불교라는 수행공동체가 발전하는데 큰 원동력이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불교를 넘어 전체 불교가 발전하는데도 또한 큰 힘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의미에서 지금까지 남자신도들에게 씌워졌던 ‘처사’라는 명칭은, 이제 불기 2562년을 보내면서 우리들 절집에서는 영영 자복 속에 덮어 두어야 할 명칭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무반야바라밀
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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